창작소설:"무서운"멸시(상)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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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한테서 멸시를 당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학생이 교수님이나 담임선생님한테서 멸시를 당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심한 “경멸”을 당했었어요! 죽도록 이 세상이 싫어졌었죠.  


중학교 때 전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시골중학교의 40명 정도 되는 반급에서 항상 37~39등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같이 다니면서 싸움질했던 기억이나, 옆집의 닭을 훔쳐서 구워먹었던 기억이 많이 남아요[낚시에 벌레 한 마리 끼워 닭한테 주면 금방 걸려요! 걸린 후에 잡아당기면 닭은 소리없이 조용히 따라오죠!]. 그땐 연애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 냥 덤덤히 살았던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성적이 괜찮았던 과목은 물리였어요. 유일하게 반급에서 랭크 5위에 속한 적 있던 과목이었죠.

 
중국에서는 수능시험이 두 번[고등학교입시, 대학교입시] 있어요.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첫해 수능시험(87년 7월)에서 전 220점(총720점) 맞았어요. 그 때 일본어는 14점(100점)이었어요. 후~ 당연 떨어졌죠. 이듬해 부모님들이 공부 좀 더 해보라고 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이 재수를 시작했어요. 88년 수능시험에는 410점 맞았어요. 어느 정도 진보는 했는데 그 해 고등학교(왕청2중) 입학점수는 489점이었어요. 70점이나 모자라죠? 후~ 당연 떨어졌죠.

부모님들한테 멸시를 당하고, 아버지한테 호되게 터지기도 했죠. 그래서 집에도 들어가기 싫었고 가출이라는 생각도 해봤었어요.  
부모님들도 이미 포기했었어요.  
“음, 자식! 공부할 머리는 아니군…”  
“이제 한해 더 학교에 보내도 아까운 돈이나 낭비하겠군! 맞지?”  
“야!, 부모님들을 따라서 이제부터 소 궁둥이나 뚜드려라!”  

그 날부터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서 농사를 배웠어요. 농사일에 흥취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일을 엄청 열심히 했죠. 소몰이도 하고, 밭갈이도 하고, 담배재배도 하고, 돼지 먹이도 주고 했어요.  
제가 다니던 중학교 가는 길과 농사일 하러 가는 길은 같은 방향이에요.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면서도 전 길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면 90도 경례를 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 최공이냐?, 오늘은 뭐하냐?”  
“감자 순 따러 갑니다.”  
“네, 감자를 거두어 들입니다…..”  
“옥수수 따러 갑니다.”  
그 때 만난 선생님들 중에서 이런 얘기가 돌았답니다. “저 놈은 예절이 밝아서 좋네…..” 그 냥 그랬어요. 아마 훌륭한 농사꾼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1988년 10월 2일이었어요. 아침에 아버지와 같이 농사일하러 떠났어요. 뭐 농사꾼의 일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 비슷할 거에요. 비가 오지 않으면 그냥 농사일에 나서는 거죠. 소달구지를 끌고 가다가 길에서 장용환 선생님을 만났어요. 장용환 선생님은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생님이시기도 해요. 아버지와 몇 마디 인사를 했어요.  
-- (후에 들은 말인데 저를 학교에 보내서 공부시키라 했다더군요. 이듬해 4월에 있는 물리경색에도 참가하도록 하면 아마 괜찮을 거라 했대요.)--

아버지와 장용환 선생님이 몇 마디 나누더니만 잠시 후 선생님이 소달구지에 있는 삽(농사기구)을 들고 저의 머리를 내리쳤어요. 참 억울하고 어정쩡했어요. 앞이마 위쪽으로 삽날이 날아 들어왔어요.

머리에서 당장 피가 났어요. 장용환 선생님한테 이유 없이 당하고 나니 주먹을 쥐고 선생님한테 난리를 피웠죠. 그러나 힘이 모자라서 왼쪽 눈까지 시퍼렇게 멍들게 됐어요. 선생님과 저의 아버지를 당해내는 재간이 없었어요. 그날 아버지는 농사일하러 그냥 가고, 저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했어요(지금도 상처자국이 있어요.)


이튿날, 아버지가 재수하지 않겠는가고 물었어요. 한심하죠. 그렇게 되면 중학교 3학년을 3년 동안 다니게 되는 것이었어요. 저는 무조건 다니지 않겠다고, 죽어도 않된다고 난리를 피웠죠. 뭐 결과는 뻔했어요. 결국 저는 아버지한테 얻어 터지고, 타협을 하게 됐어요. 다시 중학교에 가게 됐어요. 일단 한달 더 다녀보기로 약속했죠.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고등학교 입학 수능시험까지는 9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어요. 9개월이면 270일, 시간으로 따지면 6840시간이었어요. 수능시험까지는 아득했죠. 시간을 아낄 줄 몰랐어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몰랐었죠.


중학교를 다시 다녀서 한달 정도 지난 후였어요. 물리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저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엉겁결에 일어났는데 저보고 문제를 풀어보라는 거에요. 그때 저는 무협지를 보고 있었어요. 소설에 정신이 팔려서 언제 문제가 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죠.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던진 칠판지우개가 날아왔어요. 피했어요. 뒤에 있는 애가 맞았죠.  
선생님은 수업을 정지하고, 저를 보더니만 뺨을 후려쳤어요. 어찌나 세게 맞았던지 손자국이 얼굴에 그대로 찍혔어요. 지금도 간혹 그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려요.


 2004년5월초, 한국의 스승의 날을 기념하면서 2일간 정리했던 소설. 이 문장으로 나의 스승을 기념함(by 崔基哲)